1875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구 마산면 능내동에서 출생
  •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 두 명의 형들이 모두 사망하여 6대 독자로 성장
  •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으로, 아명(兒名)은 승룡(承龍)

1877

1877년
서울(당시 한성부)로 이주
  • 숭례문(남대문)밖 염동, 낙동(현 충무로 근처)을 거쳐 도동(남산 서쪽) 우수현(雩守峴)에서 성장

1879

1879년
낙동서당 입학
  • 낙동서당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대신을 지낸 이건하가 운영하던 곳으로, 이건하는 이승만의 총명함을 아껴 자신의 조카 글동무로 삼아 학비를 받지 않음

1885

1885년
도동서당에서 수학
  • 도동서당에서 <동몽선습>, <통감>, 사서삼경과 당송시문을 익히면서 과거 준비에 힘썼던 이승만은 11세 때 <통감절요(通鑑節要)> 15권을 독파하고, 19세 때는 시전(詩傳) 10권과 서전(書傳) 2권을 암송하 삼국지(三國志), 수호전(水滸傳), 서상기(西廂記), 전등신화(剪燈新話) 등의 소설도 탐독

1890

1890년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 박승선과 결혼
  • 이후 아들(이봉수)을 얻었으나, 1906년 디프테리아로 미국에서 사망함
  • 부친 이경선은 손자의 사망에 대한 충격으로 아들에게 이혼을 요구해 결국 1912년에 이혼함

1895

1895년 4월 2일
배재학당 입학
  • 신긍우(申肯雨)의 권유로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
  • 배재학당에서 서양 선교사 및 서재필, 윤치호 등으로부터 신학문을 수학
1895년 11월 29일
‘춘생문 사건’(1895년 을미사변에 대한 반동으로 기도된 사건)으로 피신
  • 황해도 평산에 사는 누이의 집에 3개월간 피신함(이후 배재학당 복귀)

1896

1896년 11월 30일
‘협성회’결성 및 창립발기 회원으로 참여
  • 협성회는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단체로서, 근대적 자주민권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함
  •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

1897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 졸업
  •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졸업생을 대표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을 함
  • 정부 고관 및 주한외국사절 등 600여명의 청중들이 연설을 경청

1898

1898년 1월
『협성회회보』발간(한글판 주간신문)
  • 양홍묵(梁弘黙) 등과 함께 순한글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를 창간하고 주필로 활동
  •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게재하여 열강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우려 함(『협성회회보』 제10호, 1898.3.5)
1898년 3월 10일
제1차 만민공동회 연설
  • 러시아의 이권 침탈(부산 절영도 조차)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연사로 참가. 정부개혁과 헌법채택을 촉구하는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 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
1898년 4월 9일
『매일신문』 창간(최초의 순한글 일간지)
  • 『협성회회보』를 한국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으로 개제하여 창간, 주필로 활동
  • 한글신문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함과 동시에 외세에 저항하는 신문의 역할을 확립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함
1898년 8월 10일
『뎨국신문』을 창간
  • 이종일(李鐘一)과 함께 『뎨국신문』을 창간하고 주필로 활동
1898년 11월
독립협회 간부 석방 투쟁 및 중추원 의관 임명
  • 11월 5일 이상재, 남궁억 등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 등 군중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11월 10일 독립협회 간부들의 석방을 이끌어냄
  • 11월 21일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던 중 수구파들이 보낸 보부상 2천여 명의 습격을 받음
  • 11월 29일 남궁억(南宮檍) 등과 함께 중추원 의관(종9품)에 임명됨

1899

1899년 1월 9일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돼 투옥(5년 7개월간)
  • 박영효(朴泳孝)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
1899년 1월 30일
  • 주시경(周時經, 본명 周相鎬)이 건네준 총을 들고 최정식(崔廷植), 서상대(徐相大)와 함께 탈옥을 기도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경무청으로 이송됨
1899년 7월 11일
  • 평리원 재판장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서에 수감됨

1900

1900년 8월
『쳥일전긔』 저술
  • 옥중에서 미국인 선교사 알렌(Young J. Allen)과 중국인 채이강(蔡爾康)이 쓴 『중동전기본말』을 순한글로 번역. (1917년에 하와이에서 『쳥일전긔』로 출판됨)

1901

1901년 2월 ~ 1904년 7월
옥중 생활 속에서도 가명으로 『뎨국신문』과 『신학월보』에 수시로 논설을 기고

1902

1902년 10월
옥중학교를 설립하여 투옥 중인 어른 및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한문, 영어 등을 교육하고 성경과 찬송가도 가르침

1903

1903년 1월
옥중서적실(書籍室: 도서실)을 개설하여 운영
1903년 4월 ~ 1904년 2월
『신영한사전』 편찬 시도
  • 1930년 4월 『신영한사전』 편찬을 시작하여 이듬해 2월 F항의 중반부 ‘Fichu(부인들의 어깨와 가슴을 감싸서 두르는 것)’까지 작업하고 『독립졍신』 집필을 위해 중단함
  • 이 사전은 영어의 쓰임새를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편찬되었는데 정확한 발음을 표시하기 위해 독창적인 방식을 고안했으며 표제어 정의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전에 미국 선교사들이 발간한 사전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음

1904

1904년 6월
옥중에서 『독립졍신』 탈고
  • 1910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초판이 출판되었으며, 1917년 호놀룰루에서 제2판이 출판되었고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재출판 됨
1904년 8월 9일
특별사면령으로 석방
  •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특별사면령을 받아 석방됨
1904년 10월 15일
상동청년학원 교장 취임
  • 남대문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가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고 이승만을 교장으로 초빙함
  • 기독교를 통한 구국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상동학원의 강사로는 미국인 선교사들과 주시경, 장도빈, 남궁억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함
1904년 11월 4일
대한제국의 독립보전을 위해 도미
  •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대한제국의 밀사 자격으로 미국으로 출항. 일본 고베를 거쳐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윤병구 목사와 합류
1904년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시카고를 경유하여 워싱턴 D. C.에 도착

1905

1905년 2월
조지워싱턴대학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
1905년 2월 20일
국무장관 존 헤이 면담
  • 휴 딘스모어 미국 하원의원의 주선으로 존 헤이 국무장관을 만나 대한제국 영토보존과 문호개방 정책 적용을 요청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으나, 석 달 뒤 존 헤이 장관이 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무위가 됨
1905년 8월 4일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면담
  • 뉴욕시 동쪽 오이스터베이의 사가모어힐 ‘여름 백악관(Summer White House)’에서 윤병구 목사와 함께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Jr.)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고 대한제국 독립보전에 대한 지원을 요청

1907

1907년 6월 5일
조지워싱턴대학교 학부 졸업
1907년 9월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 입학

1908

1908년 6월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 수료 (석사학위(M.A.)는 1910년 2월에 가서야 받게 됨)
1908년 7월 10일 ~ 15일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한인애국동지대표자대회(The Korean Patriots’ Delegation Convention)에서 의장으로 선출됨
1908년 9월
프린스턴대학교 박사과정 입학

1910

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음
  • 그의 학위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은 1912년에 프린스턴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됨
1910년 10월 10일
귀국
  • 리버풀,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서울역에 도착. 5년 11개월 6일 만의 귀국
1910년 11월 6일 ~ 1912년 3월
YMCA 한국인 총서기 겸 학감에 취임
  • YMCA 국제위원회 총무 모트(John Mott)의 추천과 서울 YMCA 총무 질레트(Phillip L. Gillet)의 제안에 따라 서울 YMCA 한국인 총서기(Chief Korean Secretary)로 선임되었고,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가로 활동

1911

1911년 5월 6일 ~ 6월 21일
전국순회전도활동
  • 협동총무 브로크만(Frank M. Brokeman)과 함께 37일간 전국을 순회하며 33회의 집회를 개최했고 총 7,535명의 학생이 참석함.
  • 이승만의 강연을 들은 학생 중에는 임병직, 이원순, 허정, 정구영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훗날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및 발전과정에 일익을 감당함.

1912

1912년 3월
일제의 경계가 심해져 도미행에 오름
1912년 5월 1일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된 ‘국제감리교대표회의’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
1912년 6월 19일
은사인 우드로 윌슨(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을 뉴저지의 시거트 별장에서 만나 한국의 독립 지원을 요청. 윌슨의 추천서를 가지고 워싱턴 등지를 다니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

1913

1913년 1월 28일 ~ 2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하여 하와이 호놀룰루 도착
1913년 2월 8일
‘한인기숙학교’ 교장직에 취임
1913년 4월
『한국교회핍박』 발간
  • 『한국교회핍박』은 ‘105인 사건’의 전말과 일제의 저의를 밝힌 책으로,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교회를 탄압한 이유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혁명사상과 민주주의적 방식, 도덕적 재무장 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함
1913년 9월 20일
순한글 월간지 『태평양잡지』 창간(1930년 『태평양주보』로 제호를 바꿈)
1913년 9월
한인기숙학교 교장에 취임 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칭하여 운영

1914

1914년 7월 29일
한인여자(성경)학원 설립

1917

1917년
호놀룰루에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긔』를 출판
1917년 10월 29일
뉴욕에서 24개국이 모여 개최한 약소민족대표회의(League of Small and Subject Nationalities)에 한국의 평의원으로 선정

1918

1918년 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와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됨
1918년 12월 23일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창립

1919

1919년 1월 6일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놀룰루에서 미주 본토로 출발
1919년 3월 3일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서 제출
  • 미국이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파리행이 좌절되었으나 정한경의 제의에 따라 완전독립을 전제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파리평화회의에 제출
1919년 3월 21일
대한국민의회의 국무경(국무 및 외무총장)으로 추대
  • 손병희를 대통령, 박영효를 부통령으로 선출한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경으로 추대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
1919년 4월 14일 ~ 16일
필라델피아 대한인총대표회의 개최
  • 서재필, 정한경 등과 함께 필라델피아 시내 리틀 씨어터(Little Theater)에서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여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건설의 대강을 담은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지지를 요청한 <미국인에게 보내는 호소문> 등 5개의 결의문을 채택함
  • 4월 16일에는 모든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시내로 나와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행진함
1919년 4월 23일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
  • 13도 대표들이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
  • 이승만이 3개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되자 일본제국 정부 명의로 이승만에게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림
1919년 4월 14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 활동본부 설치
1919년 6월 14일 ~ 27일
세계 주요국을 상대로 국가승인 요청
  • ‘대한공화국’ 대통령 직함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평화회의 의장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 발송
1919년 6월 30일
미 상원에 독립청원서 제출
  • 구미위원부 고문변호사 프레드 돌프에게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강조한 ‘대한민국을 위한 진술과 적요(Statement and Brief for the Republic of Korea)’를 작성하도록 한 뒤, 셀던 스펜서 상원의원을 통해 의회에 제출(미 의회에 한국문제를 최초로 상정)
1919년 7월 4일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 발표
1919년 7월 17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 설치
1919년 8월 25일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 설치
  • 독립외교를 전담할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 for the Republic of Korea)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김규식, 위원으로 정한경, 이대위, 송헌주, 고문변호사로 프레드 돌프를 각각 임명함
1919년 9월 6일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됨
1919년 10월 ~ 1920년 6월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독립지지 요청 연설

1920

1920년 3월
한국독립승인안 미 상원에 상정
  • 찰스 토마스, 존 쉬로스 미국 상원의원으로 하여금 한국독립승인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케 함. 상정된 안건은 본회의에서 부결됨
1920년 11월 15일
비서 임병직과 함께 호놀룰루에서 출항
  •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에 부임하기 위해 호놀룰루 항에서 비서 임병직과 함께 몰래 화물선에 오름. 일본이 30만 달러의 체포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에 중국인 시체를 넣은 관 속에 숨어 있었음
1920년 12월 28일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식 개최
  • 12월 29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초대 임시대통령 취임식을 개최하고 이후 5개월간 집무

1921

1921년 5월 29일
대통령 교서 발표 후 상해 출항
  •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으로 인해 상해를 떠난다는 대통령 교서를 발표하고 상해에서 출항
1921년 6월 29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대한인동지회 결성
1921년 8월 10일
워싱턴회의(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놀룰루에서 출항
1921년 8월 2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대표단 결성
  •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한국대표단(Korean Mission) 조직(대표장: 이승만, 대표: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돌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9월 9일 한국대표단에게 워싱턴회의(Washington Conference, 1921.11.12~1922.2.6)에 관한 전권 부여
1921년 10월 1일 ~ 12월 1일
워싱턴회의 미국대표단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 제출
  • 12월 1일 한국대표단의 청원문 <군축회의에 드리는 한국의 호소(Korea’s Appeal to the America Delegation on Limitation of Armament)> 발표
  • 12월 14일 윌리엄 킹 상원의원에 의해 미 의회에 배포

1925

1925년 3월 23일 ~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 면직안을 의결하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공표

1929

1929년 10월 5일 ~ 1930년 1월 8일
재미한인사회 시찰
  •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여 재미한인사회를 시찰하고 호놀룰루로 귀환

1931

1931년 11월 21일
  • 만주사변 발발 후 외교적 목적으로 미국으로 출항
    만주사변 발발 후 만주국 문제가 외교적 쟁점으로 부상하자 미주동포들로부터 외교자금을 조달하여 호놀룰루 출항
  • 워싱턴 D.C. 도착 후 국제연맹외교를 위한 준비활동 전개

1932

1932년 11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제연맹 특명전권수석대표로 임명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제연맹외교를 위한 특명전권수석대표로 임명하고 제네바로 파견

1933

1933년 1월 4일
제네바에서 국제연맹외교 전개
  • 1932년 12월 23일 뉴욕에서 출발하여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거쳐 국제연맹 본부가 있던 제네바에 1933년 1월 4일 도착
1933년 2월 22일
국제연맹에 성명서 제출 및 회람
  • 2월 8일 한국문제를 담은 문건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특파원들에게 배포
  • 2월 22일 이승만의 성명서가 국제연맹에 제출되었고 대한인동지회의 서신과 함께 배포 및 회람됨
  • 미국 언론과 <주르날 드 제네바>, <라 트리뷴 도리앙>, <데어 분트> 등 유럽 언론에 이승만의 외교활동에 관한 기사가 게재됨
1933년 3월
<만주의 한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 출판
  • 만주문제와 관련된 한인의 문제를 다룬 <만주의 한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을 서영해가 파리에서 운영하던 고려통신사를 통해 출판
  • 국제연맹 관계자들에게 배포
1933년 7월 9일 ~ 10일
모스크바 방문
  • 소련에게 독립지원을 호소해 보고자 비엔나를 경유하여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했으나 즉시 퇴거당함
1933년 10월 8일
뉴욕 렉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

1934

1934년 4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행서 외무위원으로 선임

1935

1935년 1월 24일
부인과 함께 호놀룰루로 귀환
  • 호놀룰루에 도착한 후 교회 건립활동과 교육기관 설립활동에 매진

1939

1939년 3월 30일
중일전쟁 발발 후 외교적 목적으로 미국으로 출항
  •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점차 세계대전의 징후가 보이자 독립외교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워싱턴 D.C.로 출발
  • 4월 13일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구미위원부 재건을 위한 시찰 및 활동을 수행
  • 8월 10일 호놀룰루로 잠시 귀환했다가 11월 10일 프란체스카와 함께 워싱턴 D.C.로 이주

1941

1941년 4월 20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으로 임명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겸 주워싱턴 전권대표로 임명
1941년 8월 1일
영문 저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출간
  • 1939년 겨울부터 1941년 여름까지 집필하여 뉴욕 플레밍 레벨사를 통해 출간했으며 부인 프란체스카가 영문 원고를 타이핑함
  • 출간 후 4개월 만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자행되자 미국의 베스트셀러로 등극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포고문 전달
  •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미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대통령 루즈벨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함

1942

1942년 1월 16일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 창설
  • 미국 의회 상원 원목 프레데릭 헤리스,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가 중심인물이었으며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
1942년 2월 27일 ~ 3월 1일
대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 워싱턴 D.C.의 라파옛 호텔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함
  • 윈크스 방송국은 라디오로 회의를 중계했고 한인들의 독립의지와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의 열의가 크게 기사화되는 계기가 됨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 시작
  •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해외 및 고국의 동포들을 격려하고 투쟁을 촉구
1942년 8월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
1942년 10월 10일
한인 게릴라조직 추진
  • 미 육군전략사무처(OSS) 프레스톤 굿펠로우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 12월 4일 OSS에 통보한 50명의 한국인 중 12명이 선발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
  • 12월 7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 발송

1943

1943년 3월 30일
하와이 한인 처우 개선 요청
  • 스팀슨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청했고, 육군장관으로부터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회신을 받음
1943년 4월 8일
아메리칸대학교 교정에서 한국 벚나무 식목행사 개최
  • 도쿄시장이 기증한 벚나무가 ‘재패니즈 체리트리’로 불리던 것을 한국 벚나무로 원산지를 바로 잡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24주년 기념식에서 식목행사를 개최
1943년 5월 15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
1943년 8월 23일
제1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

1944

1944년 1월 21일 ~ 22일
애슐랜드 한국독립 승인대회 참석
  • 오하이오주 애슐랜드에서 개최된 한국독립 승인대회에 참석
  • 카이로 선언으로 인한 대외적 한국 선전효과를 강조한 이승만의 연설은 미 전역에 라디오로 중계됨
1944년 9월 11일
제2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즈벨트와 처칠에게 카이로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냄

1945

1945년 2월 5일
미국 국무차관에게 임시정부 즉각 승인 촉구
  • 미 국무차관 조셉 그루에게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의 즉각 승인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냄
1945년 5월 14일
얄타밀약설 폭로
  •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함으로써(얄타밀약설) 미 국무부와 충돌
1945년 8월 15일
해방
  • 즉각 귀국하려 했으나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 국무부의 방해로 2개월간 지연됨
1945년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 추대
  • 여운형, 허헌 등이 좌익들이 주도하여 수립을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 주석직으로 추대받음
  • 이승만은 귀국 직후 거절의사 표명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의 귀국
  •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Bataan)호’를 이용해 김포 비행장 도착
  • 조선호텔에 투숙한 후 다음날 귀국 담화 방송
1945년 10월 23일
조선독립총성중앙협회의 총재 추대
1945년 10월 24일
돈암장(敦岩莊) 입주
  • 장진섭이 제공한 돈암장(敦岩莊)으로 거처를 이동하여 1947년 8월까지 거주
1945년 10월 31일
돈암장에서 박헌영과 회담
  • 조선독립촉성중앙협회의 회장 자격으로 박헌영에게 가입을 권유했으나 거절함

1946

1946년 1월 14일
공산주의자들과 결별 선언
  •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자주독립을 저해하는 매국노로 규정하고 결별 선언
1946년 2월 8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로 추대
  • 조선독립총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에 총재가 됨
1946년 2월 25일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으로 선출
  • 미 군정청의 의회 형식의 입법, 자문기구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으로 선출됨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
  • 각지를 순회하던 도중 전북 정읍에서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라고 역설함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 민족통일기관의 설치구상과 단독정부 수립 준비를 위해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결성
1946년 8월 14일
카이로 선언 이행 촉구
  •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카이로 선언의 조기 이행을 촉구하는 전문 발송
1946년 9월 10일
임영신을 미국에 파견
  •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으로 미국에 파견
1946년 10월 28일
모스크바 의정서 무효화 요구
  •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위배되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취소하라는 성명을 냄
1946년 12월 4일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방미
  • 단독정부 수립을 각국 대표들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동경을 거쳐 미국으로 출발

1947

1947년 4월 1일
귀국을 위해 워싱턴 D.C. 출발
1947년 4월 13일
장개석 총통 면담
  • 귀국 길에 동경과 상해를 거쳐 남경에서 장개석(蔣介石) 총통과 회견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 미소공동위원회를 반대하여 미군정에 의해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함
  • 7월 3일 좌우합장을 주장하는 하지 중장과의 협조포기 선언
1947년 9월 16일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수단으로 남한 총선거를 주장
1947년 9월 21일
대동청년단 총재로 취임
1947년 10월 18일
이화장 입주
  •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 사저에 입주
1947년 11월 14일
한국독립에 관한 문제 결의안 유엔총회 통과
  • 제2차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는 데 유엔이 개입하며,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파견하여 한반도의 현 상황과 선거 과정을 감시할 것을 가결

1948

19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서울 도착
1948년 5월 10일
최초의 자유총선거(5.10선거)에서 동대문구(갑)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
1948년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됨
  • 국회의원 196명(2명 결석)이 투표하여 180표 획득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
1948년 8월 11일
파리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운동을 펼칠 한국대표단 파견(장면, 장기영, 김활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1948년 10월 19일
맥아더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초청으로 일본 방문
1948년 12월 12일
파리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안 통과

1949

1949년 7월 15일
서울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 수여(국민 1호 명예박사)
1949년 8월 8일
장개석 총통과 진해에서 회담

1950

1950년 2월 14일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 방문
  • 재일동포 중소기업가에 대한 200만 달러 융자 약속
1950년 3월 10일
농지개혁법 개정법 공포
  • 4월 5일 농지분배 예정통지서 발송 시작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 발발
1950년 6월 26일
맥아더 장군과 통화하여 즉각 지원 요청
1950년 7월 14일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위임
  •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위임
1950년 9월 28일
유엔과는 상의 없이 국군에 38선 이북 진격을 명령
1950년 12월 24일
서울시민에 피난 명령

1951

1951년 9월 20일
휴전 수락 전제 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구
1951년 11월 19일
자유당 창당과 총재직 수락

1952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선언
  • 연안수역과 보호와 해양주권 보전을 목적으로 대통령령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선언’ 공표
  •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한일 양국의 평화와 질서를 위한 평화선’으로 부름에 따라 ‘이승만평화선(Rhee Line)’으로 불리게 됨
1952년 6월 25일
저격 미수 사건 발생
  • 6.25전쟁 2주년 기념식에서 의열단원 유시태가 권총으로 단상 위의 대통령을 3m 거리에서 저격했으나 불발되어 체포됨.
1952년 8월 5일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에 당선
  •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74.6%의 득표율로 당선
1952년 8월 15일
제2대 대통령 취임식

1953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
  • 부산, 가야 제9수용소, 광주, 논산, 마산, 영천, 부평, 대구 등지의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인 2만 7천 명의 반공포로 석방
1953년 6월 25일
미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과 회담 시작
1953년 7월 12일
한미공동성명 발표
  • 정전협정 이후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이 장기 경제원조를 보장하고 한국군 병력을 증강한다는 성명 발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1953년 11월 27일
대만을 방문하여 장개석 총통과 반공통일전선 결성 발표

1954

1954년 4월 24일
인하공과대학 설립
1954년 6월 15일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 결성
1954년 7월 25일
미국 국빈 방문
  •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
  • 7월 28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
  • 7월 31일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담 후 한국전 휴전은 사문화(死文化)되었다고 선언
1954년 8월 3일
유엔총회에서 한국 통일에 대한 지원을 역설

1955

1955년 5월 31일
한미 석유협정과 한미 잉여농산물 원조협정 체결
1955년 6월 7일
기술자 해외파견안 재가
1955년 8월 26일
국제통화기금(IMF)·국제개발은행(IBRD) 가입

1956

1956년 5월 15일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에 당선
  • 69.9%의 득표율로 당선
1956년 8월 15일
제3대 대통령 취임식
1956년 9월 22일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

1957

1957년 3월 21일
82회 탄신기념일을 맞아 우남장학회 발족
1957년 5월 5일
대한어린이헌장 제정
1957년 8월 8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가입
1957년 12월 3일
한글전용을 국무회의에서 지시

1958

1958년 3월 8일
북한에 납치된 KAL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 요구
1958년 10월 1일
대통령령으로 원자력원 직제 공포
1958년 11월 5일
월남대통령의 초청으로 베트남 방문

1959

1959년 1월 1일
이북동포들을 방송을 통해 위로
1959년 1월 21일
원자력원 창설
  • 사무총국, 원자력위원회 및 원자력연구소(3월 1일 개소)로 구성
1959년 6월 15일
재일교포 북송문제로 대일교역 중단조치 발표
1959년 6월 29일
한미 잉여농산물 협정 조인

1960

1960년 1월 1일
공무원 연금법 제정·공포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4선 확정
  •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유세기간 중 심장마비로 사망함에 따라 이승만 단독 후보가 득표율 100%로 당선
  •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목적으로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자행
1960년 4월 19일
4.19 발생
  • 19일 오후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 선포
  •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 사표 제출 지시
1960년 4월 23일
입원한 부상 학생 위문 및 애도 방송
1960년 4월 24일
4.19 유혈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 사임
1960년 4월 26일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 국민이 원한다면 ① 대통령직 사임, ② 정·부통령선거 재실시, ③ 이기붕의 공직 사퇴, ④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약속. 시위대 대표 5명과 면담 후 하야를 약속
1960년 4월 27일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
1960년 4월 28일
이화장으로 은퇴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출국

1965

1965년 7월 19일
호놀룰루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서거(향년 90세)
1965년 7월 23일
유해를 미 공군 수송기로 운구하여 김포공항 안착
1965년 7월 27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
  •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갖고 서울 시가행진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
  • 장례는 방식에 대한 논란 끝에 국장과 국민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