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

1875. 3.26.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출생
  •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 金氏, 1833~1896)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남
  •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 두 명의 형들이 모두 홍역으로 사망함에 따라 6대 독자로 성장
  •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으로, 아명(兒名)은 승룡(承龍), 호(號)는 우남(雩南)

1877

1877.
서울(당시 한성부)로 이주
  • 숭례문(남대문) 밖 염동, 낙동(현 충무로 근처)을 거쳐 도동(남산 서쪽)의 우수현(雩守峴, 임금이 기우제를 지내던 곳)에서 성장

1879

1879.
낙동서당 입학
  • 낙동서당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대신을 지낸 이건하가 운영하던 곳으로, 이건하는 이승만의 총명함을 아껴 자신의 조카 글동무로 삼아 학비를 받지 않음

1885

1885.~1894.
도동서당(한성부 용산)에서 수학
  • 양녕대군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이근수가 운영했던 도동서당 근처에 양녕대군의 위패를 모신 지덕사(至德寺)가 있었는데, 이승만 가족은 사당에 딸린 초가집에서 생활함
  • 지덕사는 임금이 기우제를 지내던 우수현의 남쪽에 있었는데, 이승만의 호인 ‘우남’은 우수현의 남쪽이라는 뜻임
  • 도동서당에서 <동몽선습>, <통감>, 사서삼경과 당송시문을 익히면서 과거 준비에 힘썼던 이승만은 11세 때 <통감절요(通鑑節要)> 15권을 독파하고, 19세 때는 시전(詩傳) 10권과 서전 (書傳) 2권을 암송하여 천재 소리를 들었고, 삼국지(三國志), 수호전(水滸傳), 서상기(西廂記), 전등신화(剪燈新話) 등의 소설도 탐독

1887

1887.
아명 승룡(承龍)을, ‘승만’(承晩)으로 개명(改名)
  • 1887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함

1890

1890.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 박승선과 결혼
  • 이후 아들(이봉수)을 얻었으나, 1906년 디프테리아로 미국에서 사망함
  • 부친(이경선)이 며느리(박승선)에게 손자의 사망 책임이 있다며 이혼을 종용해 결국 1912년에 이혼함

1895

1895. 4. 2.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 입학
  •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방황하던 이승만은 도동서당 친구 신긍우의 권유로 입학함
  • 아펜젤러 등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배웠고,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독립운동 참여 계기가 됨
1895.11.29.
‘춘생문 사건’(1895년 을미사변에 대한 반동으로 기도된 사건)으로 피신
  • 황해도 평산에 사는 누이의 집에 3개월간 피신함(이후 배재학당 복귀)

1896

1896. 5.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음
  • 서재필은 이승만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고, 후일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함
1896.11.30.
‘협성회’ 결성 및 참여(창립발기 회원)
  • 협성회는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단체로서, 근대적 자주민권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함
  •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을 맡아 적극적인 활동 전개함
  •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와 구국운동의 방향을 모색한 협성회는 회원 수가 1년 만에 13명에서 200명으로 늘어났고, 1898년 2월에는 300명으로 증가함(지방 협성회도 조직)
1896. 7. 8.
배재학당 졸업
  • 새로 지은 정동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졸업생을 대표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의 영어 연설 시행
  •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조선의 독립을 역설, 참석한 정부 고관 및 주한외국사절 등 600명의 청중을 사로잡음
  •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1898

1898. 1.
<협성회회보> 발간(한글판 주간신문)
  • 배재학당 동창인 양흥묵과 함께 협성회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발간하고 주필을 맡아 정부를 비판하는 논설 등 게재
  • 이승만은 열강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이 쓴 시(詩) ‘고목가(枯木歌, Song of an Old Tree)’를 게재(협성회회보 제10호, 1898.3.5.)
  • ‘고목가’는 대한제국을 늙고 병든 고목에, 친러 관료는 땃작새(딱따구리)에, 러시아의 위협은 ‘비바람’에 비유하며 불안한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는 내용의 한국 최초의 현대시(現代詩)로서, 이후 대한제국기에 발행된 신문과 잡지에 유행했던 많은 애국시와 독립가의 효시임
1898. 3.10.
제1차 만민공동회 연설
  • 러시아의 이권 침탈(부산 절영도 조차)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연사로 참가, 정부개혁과 헌법채택을 촉구하는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 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
1898. 4. 9.
<매일신문> 창간
  •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창간한 뒤 기재원(기자)과 주필로 활동
  • <협성회회보>를 개제(改題)해 창간된 <매일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로서, 순한글체의 언문일치문장을 사용, 한글신문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함과 동시, 외세에 저항하는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함
  • 1898년 5월 16일자(제32호) 1면에 러시아와 프랑스 양국이 대한제국 정부에 대하여 토지와 탄광에 관한 이권을 요구해 온 외교문서 폭로
1898. 8.10.
<제국신문> 창간
  • 이종일과 함께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편집 및 논설 담당
1898.11. 5
독립협회 간부 석방 투쟁 및 중추원 의관 임명
  • 1998년 11월 황국협회장 이기동(李基東)을 비롯해 조병식(趙秉式), 유기환(兪箕煥) 등이 모의해 고종(광무황제)에게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17인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 한다’며 무고(誣告) 상소를 올렸고, 고종은 독립협회 등 민간단체의 해산과 이들의 체포를 지시함
  • 11월 5일 이상재, 남궁억 등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 등 군중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11월 10일 독립협회 간부들의 석방을 이끌어냄
  • 11월 15일 고종은 내각을 개편하고 독립협회의 복설(復設)을 허락하는 동시에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것을 약속하고 조병식 일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
  • 11월 21일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던 중 수구파들이 보낸 보부상 2천여 명의 습격을 받음
  • 11월 28일 고종은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이승만, 남궁억 등 50여명을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됨

1899

1899. 1. 9 ~ 1904. 8. 9.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돼 투옥(5년 7개월간)
  • 1898년 12월 15일 중추원 첫 회의에서 이승만, 최정덕 등 독립협회 출신 의관들이 일본에 망명한 개화파 11명의 사면과 조선왕실에서 역적으로 취급하던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를 중추원 의장에 임명할 것을 요구함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됨
  •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 의관들이 황제폐위를 도모하고 있다고 여긴 고종은 중추원을 해산하고 독립협회 의관들을 체포할 것을 지시하자, 이승만은 남대문 근처의 의료선교사 올리버 알 애비슨(Oliver R. Avision)의 집으로 피신함
  • 1899년 1월 9일 의료선교사 해리 셔먼(Harry Sherman)의 왕진 통역으로 따라나섰다가 사복 순검들에게 체포되어 경무청 구치소에 수용
  • 1899년 1월 30일 배재학당 동창이자 독립협회 동지인 주상호(한글학자 주시경)에게 전달받은 권총으로 간수들을 위협하며 두 명의 동지(최정식, 서상대)들과 경무청에서 탈출했으나, 종로에서 다시 체포돼 한성감옥서에 수감 됨
  • 한성감옥서에서 미결수로 있는 6개월 동안 황국협회 소속 박들북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안면 경련 등)으로 평생 고생함
  • 1899년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재판장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 받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 됨(같이 탈옥했던 최정식은 처형당함)

1900

1900. ~
1904. 7.
한시(漢詩) 다수 작시(作詩)
  • 1900년 봄부터 1903년 9월 15일까지 쓴 이 시들은 훗날 ‘체역집(替役集)’(1961)이란 제목으로 묶여 출간됨
  • 체역은 ‘신체적인 노역(勞役)을 정신적인 노역으로 바꾸겠다(替)’는 의미로, 판결에 따라 감옥 안에서 노역은 하고 있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까지 바뀌지는 않았다는 자부심의 표현을 담은 것으로 해석됨
1900. 8.
<청일전기> 저술
  • <청일전기>는 청일전쟁 전후의 국제관계와 각종 협정 등 국제외교, 전쟁 과정 등을 기록한 역사서로, 1917년 하와이에서 출판됨
  • 이승만은 <중동전기본말(中東戰記本末)>(영J.알렌-채이강 共著)을 한글로 편역(編譯)한 뒤, 자신의 논설 ‘전쟁의 원인’, ‘권고하는 글’을 덧붙여 <청일전기>를 완성함

1901

1901. 2. ~ 1904. 7.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 가명으로 논설 수시 게재
  •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 장애를 겪으면서도 옥중 집필 활동을 했으며, 기독교 관련 글은 <신학월보(神學月報)>에, 정치 관련 글은 <제국신문>에 게재함
  • 필자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영친왕 이은의 생모 엄비(嚴妃) 등 그가 쓴 글임을 아는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의 옥중 개화계몽운동을 지원함

1902

1902. 8. ~
옥중학당 개설 및 선교 활동
  • 한성감옥서의 옥사장인 김영선의 도움을 받아 ‘옥중학당’을 개설, 처음에는 부모를 따라 감옥에 들어온 13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으나, 나중에는 일반 수감자들과 간수들까지 가르침
  • 함께 수감된 신흥우, 안국선 등 정치범들이 교사가 되어 한글과 한문, 영어, 국사, 성경 등을 가르쳤고, 당시로서는 새로운 과목이었던 산수, 지리, 일본어, 세계사까지 가르침
  • 이승만은 개화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도서실을 개설, 처음에는 자신이 읽은 책과 선교사,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250여권의 책으로 서가를 채웠으나, 출옥 당시에는 장서가 523권으로 늘어남
  • 후일 한성감옥서에 들어간 김구는 이 도서실에서 이승만의 이름이 쓰여 있는 책을 보고 감격한 사실을 <백범일지>에 기록함
  • 한편 그는 배재학당에서 배운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신약성경을 수없이 소리 내어 읽는 동안 회심을 했고, 수감자와 간수 등 40명을 전도해 서양 선교사들의 관심을 끌었음
  • 또한 영어로 된 유럽 역사와 세계사 등 많은 서적과 비종파적 종교주간지 <Outlook>를 비롯한 신문 잡지를 탐독해 영어 실력은 발전했고, 지식의 수준도 크게 향상됨. 미국 유학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고 박사 학위까지 취득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옥중 독서가 있었기에 가능했음

1903

1903. 4. ~ 1904. 2.
<신영한사전> 편찬 시도
  • <독립정신> 집필에 주력한 탓에 ‘fichu(부인들의 어깨와 가슴을 감싸서 두르는 것)’까지만 기술하고 중단되었으나, 이승만의 해박한 지식과 언어적 통찰력을 엿볼 수 있음
  • 일반인을 주된 이용대상으로 삼은 이 사전은 자신이 배우고 익힌 영어의 쓰임새를 토대로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되었는데, 일반인을 주된 이용대상으로 했고, 정확한 발음을 표시하기 위해 독창적인 방식을 고안했으며, 표제어 정의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다는 점 등에서 이전에 미국 선교사들이 발간한 사전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음

1904

1904. 6.29.
<독립정신> 탈고(脫稿)
  • 총 52편으로 구성된 <독립정신>은 서양의 선진문명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할 것을 백성에게 호소한 근대적인 정치사상이 담긴 도서로, 이승만이 도미한 이후인 191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출판본이 나옴
1904. 8. 9.
특별 사면령으로 석방
  • 1904년 2월 8일 일어난 러일 전쟁의 전황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민영환, 한규설 등의 건의로 7월 8일 조칙(詔勅)이 내려져 수감된 정치범들을 석방하기 시작했고, 이승만은 8월 4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8월 9일 석방됨
1904.10.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 취임
  • 출옥 후 다시 <제국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으나, 그의 글이 문제가 되어 정간을 당한 와중에 지금의 남대문시장 새로나 백화점 자리에 있었던 상동 감리교회의 전덕기 목사가 청년학원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초빙함
  • 기독교를 통한 구국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상동학원의 강사로는 미국인 선교사들과 주시경, 장도빈, 최남선, 남궁억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음.
1904.11. 4.
미국 유학길에 오름
  • 일본이 전쟁 기간에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도왔다는 이유로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해 시설과 자원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자, 고종황제는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의 거중조정(居中調整) 조항을 근거로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밀사 파견을 추진함
  •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로부터 정부 밀사 역할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고 이를 수락함
  • 인천항에서 일본 고베로 가는 배를 탄 이승만은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1904년 12월 31일 워싱턴에 도착함

1905

1905.1.15.
<워싱턴 포스트>와 인터뷰
  •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과정을 폭로하며 비판함
1905.2.20.
국무장관 존 헤이와 면담
  • 휴 딘스모어 연방하원 주선으로 존 헤이의 국무장관을 만나 대한제국의 영토보존과 문호개방 정책 적용을 요청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으나, 석 달 뒤 존 헤이 장관이 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무위가 됨.
1905. 2.
조지워싱턴대학교 입학
  • 면접에서 유창한 영어와 깊은 서양사 지식을 보유하고 있음이 확인되어 배재학당 졸업을 초급대학 학력으로 인정받아 문리과대학(철학과정) 2학년 2학기에 과정에 편입했고, 1907년 6월 5일 졸업함
1905. 8. 5.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면담
  • 이승만은 윤병구 목사와 함께 하와이 4천 한인과 1,200만 대한제국 백성을 대변하는 평민대표자격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하와이 한인들의 대한제국 독립보전 청원서를 전달함.
  • 청원서를 살펴본 루즈벨트는 워싱턴의 대한제국공사관을 통해 미 국무부에 청원서를 공식 제출하면 포츠머스회담에서 정식으로 다루겠다고 답변했고, <워싱턴 포스트>에 면담 기사가 실림
  • 워싱턴공사관으로 찾아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대로 청원서를 미 국무부에 제출할 것을 요청했으나, 김윤정 대리 공사가 서울의 훈령이 없으면 제출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함.

1907

1907. 6.23.
YMCA강연에서 한국을 소개한 내용이 <워싱턴 포스트>에 실림
1907. 7.
<뉴저지애즈베리파크프레스>, <뉴욕모닝포스트> 등에 일본의 강압을 폭로
1907. 9.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 입학
  • 대한제국에 서양문명을 도입하기 위해 서양사를 전공을 선택했으며, 역사학 4개 과목, 정치학 2개 과목, 경제학 1개 과목을 수강함
  • 1년 만에 석사 과정을 거의 마쳤으나 장인환의 스티븐스 살해 사건이 일어나 한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돼 학업을 중단함
  • 이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1909년 여름 학기에 미국사 한 과목을 더 이수해 1910년 2월 석사 학위를 취득함.

1908

1908. 7.
덴버 한인대회 참석
  • 콜로라도주 덴버의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5일 간 열린 ‘한인애국동지대표자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33세에 민족 지도자의 위치에 오름
  • 망해가는 조국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 해외 한인들이 단결할 것을 선언한 덴버 대회는 최초의 한인국제대회였으며, 이승만은 폐회사에서 ‘한민족은 4천 년 이상 독립을 유지했을 정도로 강인하기 때문에 결코 일본에게 말살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피력함
  • 스탠포드대학교 총장 데이브드 조던이 축사를 했으며, <덴버 리버풀>이 대회 과정을 자세히 보도함
  • 신문기자로 조선에 체류하면서 <조선의 비극> 등을 써서 대한제국이 왕권을 잃어가는 과정을 외국에 알렸던 영국 언론인 프레데릭 맥켄지는 대회 후인 8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대회 불참에 아쉬움을 표명한 뒤, ‘조선인들도 언젠가는 부강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함
1908. 9.
프린스턴대학교 박사 과정 입학
  • 미국의 유명 대학들처럼 프린스턴대학교도 석,박사과정을 통합해 운영해 석사학위가 없었던 이승만도 입학이 가능했고, 이곳에서 정치학과 국제법을 전공하고 1910년 6월 박사 학위(Ph.D)를 취득함
  • 학위 논문 <중립에 대한 미국의 영향(Neutrality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은 1912년 프린스턴 대학출판부에서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됨
  • 이 논문은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미국의 자유통상무역과정을 분석하여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파헤친 국제법 변천사의 연구서로, ‘미국의 힘’을 이용하려는 ‘외교독립론’의 이론적, 역사적 근거를 확인한 ‘용미론(用美論)’의 기초라 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 탄생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음

  • 이승만은 이곳에서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총장과 각별한 교분을 쌓았는데, 윌슨은 이후 정계에 진출해 뉴저지주 주지사를 거처 28대 대통령이 됨

1910

1910. 2.10.
<독립정신> 출간
  • 덴버대회 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이승만은 문양목 등 기호지방 출신들로 구성된 대동보국회 인사들을 만나 교분을 다졌는데, 나중에 이들은 이승만에게 혈서로 된 편지를 보내 자신들의 지도자가 될 것을 간청했고, <독립정신>을 책으로 출간해 줌
  • 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제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절판되었으나, 1993년 1월 정동출판사에서 재출간함
1910.10.10.
귀국 및 애국계몽운동
  • 서울 기독청년회(YMCA) 총무 필립 질렛의 초청을 받고 한일합방 직후인 10월, 6년 만에 귀국해 YMCA 학생부 간사와 부설 고등학교 학감으로 일하며 1911년 두 차례 전국 전도여행을 가짐
  • 이승만은 전국 기독교학생회를 조직하고 강연을 통해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난 윤치영, 임병직, 이원순, 허정 등은 훗날 대한민국 건국 및 발전 과정에 일익을 감당함
  • 이승만은 첫 집회에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임금, 양반, 상투 세 가지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는 발언을 해 사람들을 놀라게 함. 여기에서 군주제, 신분제, 봉건제를 반대하는 자유주의자 이승만의 사상을 엿볼 수 있음
  • 이승만의 기독교 선교를 통한 애국계몽활동은 일본이 기독교 민족주의를 말살하기 위해 날조한 ‘105인 사건’의 계기가 됨

1912

1912. 3.
‘105인 사건’으로 미국 망명
  • 600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체포돼 3명이 고문으로 숨지고 135명이 옥살이를 하게 됐던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영이 1912년 2월 체포돼 3년 동안 감옥에 갇힘
  • 이승만을 보호하던 미국 선교사들의 출국 권고에 따라 이승만은 국제감리교총회의 한국대표 자격으로 다시 도미(渡美)함
1912. 6.19
우드로 윌슨 면담
  • 이승만은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을 앞두고 있던 프린스턴대학교의 은사 우드로 윌슨을 만나 단행본으로 출판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을 전달하였고, 이후에도 두 차례의 만남이 있었음

1913

1913. 2.
<한국교회핍박>
  • 이승만은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박용만이 운영하는 신한국보사에서 이 책을 출간함.
  • <한국교회핍박>은 ‘105인 사건’을 분석한 책으로, 이승만은 일본이 조선의 개신교를 탄압한 이유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혁명사상과 민주주의적 방식, 청교도 윤리 확산을 통한 도덕적 재무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고 기술함
1913. 8.
하와이 한인기숙학교 교장 겸 한인기독학원 원장
  • 1904년 첫 미국행 때 기착지였던 하와이에 만난 존 와드먼 목사로부터 학교의 운영권을 넘겨받아 <한인중앙학교>로 이름을 바꿈
  •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후원으로 설립, 운영된 한인기숙학교는 초등학교 과정의 공민학교(公民學校)였는데, 이승만이 운영권을 넘겨받을 당시 재학생은 65명이었음.
1913. 9.
<태평양잡지> 창간
  • 한인기독학원이나 한인기독교회로부터 월급을 받지 않았던 이승만은 언론인과 문필가로 활동하며 동포들을 계몽하고 국제정세를 알릴 필요하다고 생각해 <태평양잡지>를 발간함
  • 이후 발행 회수를 늘이기 위해 1930년에는 제호를 <태평양주보>로 바꾸었으나 재정난과 개인사정으로 종종 발간이 중단됐음
  • <태평양주보>는 동지회의 후원으로 1970년 2월까지 발간됨

1915

1915.10.
하와이 한인여자학원 설립
  • 하와이에 거주했던 한인 여자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실태를 알게 된 이승만은 사비로 6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 ‘웨슬리홈’ 기숙사에 거주하게 하고 한인중앙학교에 다니도록 했음
  • 그러나 보육원 측은 감리교 선교부가 한인중앙학교를 세울 당시 여학생 교육에 간여하지 않겠다고 여선교회에 약속한 것과 인종통합교육 미실시 등을 이유로 한인중앙학교를 다니는 것에 반대함
  • 민족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한인여자학원을 세웠고, 개원식에서 안창호가 축사를 했음

1918

1918.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및 한인기독교회 설립
  • 감리교 선교부의 인종통합교육 실시 방침에 따라 학생들이 한국말과 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자 이승만은 1916년 감리교 선교부와 관계를 끊고, 한인들의 재정지원을 받아 1918년 한인기독학원을 세움
  • 감리교와 관계를 끊은 이승만은 평신도 중심의 회중교회의 모범을 따라 ‘한인기독교회’를 세우고 특정교단에 가입하지 않은 독립교회로 운영했다.
1918.10.
국내지도자들에게 한인의 독립의지 표출을 위한 대규모 군중시위 촉구
  • 하와이에서 교육선교 활동을 하면서 국내지도자들에게 세계에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알릴 대중시위를 촉구함으로써 3.1운동 촉발에 기여함
1918.12.
파리 평화회의 대한인국민회 대표 선임
  • 1차 세계대전 승전국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파리 평화회의가 1919년 1월 초부터 열리게 되자 이승만은 파리로 가서 독립을 호소하려 함
  •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파리로 갈 한인대표로 이승만과 정한경, 민찬호 3명을 임명함

1919

1919. 3.
국제연맹위임통치 청원서 파리 평화회의 제출
  • 미 국무부는 승전국 일본의 반발을 우려해 이승만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았고,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파리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회신을 보냄
  • 파리행이 좌절된 이승만은 정한경과 차선책을 강구한 끝에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미국 대표단을 통해 평화회의에 제출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함
  • 위임통치는 파리 평화회의에서 채택된 방안으로, 패전국인 독일, 터키 등의 식민지를 국제연맹이 관리하다가 때가 되어 독립시키는 것인데, 이승만은 미국이 통치를 희망함
  • 이승만의 국제연맹위임통치 청원은 안창호가 동의했고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도 비슷한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위임통치가 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달라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많은 비난을 받았음
  •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는 훗날 그가 대통령직 탄핵의 주된 요인이 됨
1919. 3.21.
대한국민의회 국무경 선임
  • 이승만은 손병희를 대통령, 박영효를 부통령으로 출범한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露領 임시정부)에서 국무경(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이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턴 D.C.에서 통보받았으며, 4월 7일 대한국민의회 국무경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함
1919. 4.11.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추대
  • 이승만은 자신이 국무총리로 추대된 사실을 4월 15일에 알게 됨
1919. 4.14.~16.
필라델미아 대한인자유대회 개최
  • 이승만은 서재필, 정한경 등과 함께 3.1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대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였고, 이 자리에서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선언함
  • 4월 16일 모든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독립기념관을 향해 시가행진을 했는데, 취주악대(吹奏樂隊, 금관악기를 중심으로 편성된 악대)가 선두를 이끌었고 필라델피아 시장도 참가함
  • 행렬이 독립기념관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발표했던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낭독했고, 참가자들을 ‘대한민주국 만세’, ‘미국 만세’를 외쳤으며,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이 사용했던 의자에 앉아 기념촬영을 함.
1919. 4.23.
한성 정부 집정관총재 추대
  • 이규갑, 홍진 등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경성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는 월남 이상재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했고 이승만은 이 사실을 5월말에 알게 됨
  • 이승만이 3개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일본제국 정부 명의로 이승만의 목에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림
1919. 5.18.
<뉴욕타임즈> 기고
  • 예일대학교 명예교수 조지 래드가 <뉴욕타임즈 매거진(5.11.)>에 ‘한국인은 자치능력이 없다’는 내용의 글을 싣자, 이승만은 이를 반박하는 장문의 글을 <뉴욕타임즈>에 기고함
  • 이 논쟁은 6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로 인해 재미한인들과 미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승만의 이름이 더욱 알려짐.
1919. 6.
세계 주요국을 상대로 국가 승인 요청
  • 한성 임시정부 집정관총재가 대통령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대통령 직함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에 한인들의 민주적인 정부가 탄생했다는 공문을 보냄
  • 특별히 일본 천황에게는 임병직을 워싱턴의 일본공사관으로 보내 공문을 전달했는데,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정의에 입각하여 한국 독립을 승인할 것이며 이런 용단을 일본이 내린다면 일본은 전세계 사람들로부터 격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양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만약 이런 선의의 제의를 일본이 거부할 경우엔 한국 민족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결국 자유를 획득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일본은 영원히 침략자로서 국제사회로부터 불신과 모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1919. 7. 4.
대한민주국 국호 사용
  • 대한공화국 국호를 대한민주국으로 바꾸고 7월 17일 대한민주국 공사관을 워싱턴 DC에 설치함
  • 이어 대한민주국 공사관의 명칭을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Korean Commission)로 바꾸고, 위원장에 김규식, 위원으로 정한경, 이대위, 송헌주 등 3명을, 고문변호사로는 프레드 돌프(Fred A. Dolph)를 각각 임명함
  • 구미위원부의 정식명칭은 ‘대한민국특파 구미주찰위원부’(歐美周察委員部, 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 for the Republic of Korea)임
1919. 8.
<대한독립혈전기> 출간
  • 3.1운동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 태평양잡지사를 통해 출간된 이 책에서 자신의 직함을 ‘대한민주국 대통령’으로 표기했고, 대통령 교서에 해당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함
1919. 6.30.
미 상원에 독립청원서 제출
  • 구미위원부 고문변호사 드레드 돌프에게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강조한 <대한민국을 위한 진술과 적요(Statement and Brief for the Republic of Korea)>라는 제목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게 한 뒤, 이를 미주리 출신 상원의원 셀던 스펜서를 통해 상원의회에 제출하게 함(미 국회에 한국문제를 최초로 상정)
  • 이에 따라 8월 16일에는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호머 헐버트의 의회 증언이 이루어졌으며, 9월 19일에는 프레드 돌프의 한국승인 지지 논설이 미 국회의사록에 수록됨
1919. 9.11. ~ 1925.3.21.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1920

1920. 3.17.
한국독립승인안 미 상원에 상정
  • 찰스 토마스와 존 쉴로스 상원이 제출한 한국독립승인안이 아일랜드독립승인안과 함께 상정됐으나, 아일랜드독립승인안만 통과됨

1921

1921.10.10.
워싱턴 회담 참석 무산
  •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까지 열리는 워싱턴 회담(Washington Conference)에 대한민국이 참여해 한국 문제를 부각시키고자 1921년 9월 임시정부 대표단을 구성하고 워싱턴을 방문, 미국 대표단 단장인 허그스 국무장관과 군축 회의 사무국에 한국대표단이 정식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음
  • 이에 이승만과 대표단은 옵서버 자격이라도 얻어 회의에 참석해 한국 문제를 논의하고자 3개월 동안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했고, 프레드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논설이 1921년 12월 1일자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성과만 거둠
  • 이에 이승만은 열강을 향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탈취할 수 있는 대로 탈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통용될 때, 강대국은 이해가 상반되는 다른 강대국으로부터 정치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 결과가 전쟁을 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오직 이러한 현실에서 외면당한 약소 국민만이 그들의 정당한 주장조차 펴지 못하고 주권을 유린당하게 되는 것이다”고 경고함
  • 이 회의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서구 열강에 대한 기대를 접었고,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운동이 확산되면서 좌익과 우익의 분화가 본격화되었다.

1922

1922. 2.
영국 문필가 H.G 웰스 면담
  • 웰스를 만나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

1924

1924.11.
대한인 동지회 종신총재

1925

1925. 3.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 대통령 지위를 잃어 독립운동에 지장을 받음

1932

1932.11.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제연맹 특명전권대사
  • 김구의 임시정부에 의해 국제연맹 특명전권대사로 임명 된 후, 1933년 1월과 2월에 제네바국제연맹에서 한국 독립을 호소함
  • 국제연맹 관계자 등에게 <만주의 한국인>이라는 책자를 배포하고, <주르날드제네바>, <라트리뷴도리앙>, <데어분트> 등의 언론과 인터뷰 함

1933

1933. 3.
대한민국 임시정부 무임소 국무위원
1933. 6.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1933. 7.
모스크바 방문 및 추방
  • 모스크바에 독립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추방당함

1934

1934. 1.~12.
미국 전역을 돌며 임시정부 지지 호소
  • <워싱턴데일리뉴스>, <몬태나스탠다드>, <로스앤젤레스타임즈>, <몬태나크로니클> 등과 인터뷰를 하고 원고를 게재함
1934. 4.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

1935

1935. 1.24.
호놀롤루 <스타블레틴>에 제네바 활동 보도
  • 이승만의 제네바 국제연맹 활동이 상세히 보도 됨

1939

1939. 4.
활동무대를 워싱턴DC로 옮김
  •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조짐이 있자,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이주함
1939.11.
언론인 에드윈 힐을 고용해 독립의지를 알리는 글을 쓰게 함
1939.12.10.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
  • 중국내 한인독립투쟁을 소개

1941

1941. 4.20.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
1941. 6.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겸 주워싱턴 전권대표 임명
  • 임시정부의 지원으로 미국 정부를 상대할 공식직함을 가지게 되었고, 이승만은 자신을 영어로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이라고 소개함
1941. 6. 6.
미 대통령에게 서한 발송
  • 임정승인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서한 발송
1941. 8.
<일본내막기> 출간
  •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견한 내용을 담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뉴욕에서 출간해 루스벨트 등 미 정부 고위층에 전달함
  •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출간 5개월 만에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됨
1941.12. 9.
대일선전포고문 전달
  • 임시정부에 요청해 받은 대일선전포고문을 루스벨트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전달함
1941.12.11.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
  • 그 후 같은 내용의 요청을 30회 정도 반복함

1942

1942. 1. 2.
미국무부 실세 앨저 히스 면담
  •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 필요성을 역설함
1942. 1. 16.
한미협회 설립
  • 한국 독립을 도울 미국인들로 한미협회를 조직함. 그들 가운데는 미연방상원 원목(院牧), 전 캐나다 대사, 아메리칸대학 총장, 변호사, 중진 언론인 등이 포함 됨
  • 한미협회는 3월 1일 워싱턴 라파예트 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고 미국의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미국무부는 관리 2명을 참관시킬 정도로 관심을 표시
1942. 2.
한국인을 적성국민으로 취급하지 말 것을 미국에 요청
1942. 2. 7.
미 국무부에 임시정부 승인 요청서 제출
  • 미국무부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신탁통치를 구상한 랭던보고서를 작성함
1942. 3. 6.
미 국무부에 임시정부 승인 요청 및 한국인 참전 건의
  • 임시 정부의 즉각 승인과 한인들을 일본과의 전쟁에 활용할 것을 미국무부에 건의함
1942. 3.24.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의 외교적 지위 인정 요구
  • 코렐 헐 국무장관에게 조미수호조약(1882)을 상기시키며 임시정부의 외교적 지위를 인정하라고 요구
1942. 5. 5.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 촉구
  • 한미협회가 미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했으나, 국무장관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싸우는 민족만 지원한다’는 원칙을 제시함
  • 이는 한국인이 싸우지 않는 민족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으로, 이에 대해 제임스 크롬웰이 강력히 항의함
1942. 6.13.
미국의 소리(VOA)를 통해 격려방송 시작
  • 국내 및 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격려하는 라디오 단파방송을 시작함
1942. 9.22.
기독교인친한회 조직
  • 미국인 기독교인들로 (선교사 출신인 헐버트, 애비슨, 피치 부인 등이 포함됨)
1942.10.
한인 게릴라조직 설치 추진
  • 미육군 전략첩보국(OSS)과 협조해 한인 게릴라조직을 시도. 장기영, 이순용, 정운수 등 12명이 선발되어 훈련을 받음

1943

1943. 2.16.
한반도에 공산정권 수립 경고
  • 중경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 전쟁 후 한반도에 공산정권이 서는 불행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미 국무부에 경고
1943. 2.
미육군장관에게 한인게릴라 조직을 제의,
  • 장석윤 등이 특수훈련을 받고 미군에 입대함
1943. 2.23.
루스벨트 대통령의 한인 실상 언급
  • 루스벨트 대통령이 라디오 방송에서 일제치하에서 한국인들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다는 말을 한 것은 한인들의 독립의지가 미 대통령에 전달되었다는 증거이며, 이승만은 감사의 서한을 보냄
1943. 3.31.
임시정부 승인안이 미 하원에 제출됨
1943. 4.22.
임시정부 승인안이 미 상원에 제출됨
1943. 3.
하와이 한인 대우 개선 요청
  • 미 육군장관에 한국인을 일본인과 다르게 대우하라고 요청했고, 6월에 찬성한다는 회답을 받음
1943. 5.15.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즉각 승인 요청
  • 소련의 공산화 야욕을 지적하며 임시정부의 즉각 승인을 요청했고, 한미협의회와 기독교인친한회도 동시에 같은 요청서를 루스벨트에게 보냄
  • 5월 26일에 루스벨트의 최측근인 해리 홉킨스로부터 접수 통보를 받았고, 8월 29일 같은 내용의 전문을 제1차 퀘백 회의에 참석한 루스벨트에게 재차 전달
1943.11.19.
존 무어 목사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서신 발송
  • 감리교목사 존 무어가 미국이 1908년에 일본의 조선합병을 인정했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냄
1943.12. 1.
카이로 선언
  •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 장제스 총통이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합의했고, 11월 28의 테헤란회담에서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12월 1일 선언문이 발표됨
  • 루스벨트의 최측근으로 독실한 감리교도이고 이승만의 지인이었던 해리 홉킨스가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의 결실이라 할 수 있으며, 이승만은 12월 9일 루스벨트에게 감사 서한을 전보로 보냄

1944

1944. 2.
한국독립의 날 행사 참석
  • 오하이오 주 애쉴랜드 상공회의소가 한국독립의 날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을 강력히 요청함
1944. 9.11.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보 발송
  • 제2차 퀘백회의에 참석한 루스벨트에게 전보를 보내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준다는 카이로 선언의 문구가 독립을 늦출 위험이 있다며 즉각 독립을 요구했고, 10월에도 같은 내용의 서한을 백악관으로 다시 보냄

1945

1945. 2.
국무차관 조셉 그루에게 임시정부 즉각 승인 요구
  •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공산화 야심을 알리면서 임시정부의 즉각 승인을 요구함
1945. 3.
엘리노어 여사 면담
  • 루스벨트 대통령부인인 엘리노어 여사를 만나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함
  • 미국무장관 스테티니우스에게 서한을 보내 4월에 열릴 샌프란스스코 UN창립총회에 임시정부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
1945.
냅코 계획 수립
  • 한인 게릴라를 한반도에 투입하기 위한 ‘냅코’계획 수립했으나 태평양 전구 군사령관들이 허가하지 않아 실행되지 못함
1945. 4.
샌프란시스코 UN창립총회에 임시정부의 대표권을 요구
  • 로버트 올리버의 도움으로 <한국의 경우 : 미국외교의 역설>이란 책자를 제작해 샌프란시스코 UN창립총회에 배포함
1945. 3. 8.
미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의 대표권을 요구
1945. 5. 8.
얄타회담 밀약설 폭로
  • 임시정부의 대표권 요구에 대해 UN총회 측의 반응이 없자, 이승만은 얄타회담 때 한반도를 소련에 넘긴다는 비밀 합의가 있었다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해 파문을 일으킴
  • <시카고 트리뷴>,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로스앤젤레스 이그재미너>가 대대적으로 보도함
  • 소련은 5월 24일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부인했고, 6월 7일에는 처칠 수상과 미 국무차관도 이를 부인함
1945. 5.15.
UN창립총회에 임시정부 대표 초청 요청
  • 트루먼 대통령에게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UN창립총회에 임시정부의 대표를 초청해 참석시켜 줄 것을 요청함
1945. 7. 18.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보 발송
  •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트루먼에게 얄타 밀약이 사실이 아니라면, 미, 영, 소 3국 정상들이 부인성명을 발표할 것과 임시정부 승인과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에 대해서 합의해 줄 것을 달라고 요구함
1945. 7.25.
얄타 회담 밀약 진위 확인 요구
  • 미 국무부 극동국장 대리에게 얄타 밀약의 진위 확인을 요구함
1945. 9.6. ~
1946. 2.19.
선인민공화국 초대 주석(명목상)
1945.10.16.
33년 만의 귀국
  •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Bataan)호’를 이용해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강대국들이 분열을 이유로 독립을 늦추지 못하도록 국민 단결을 강조함
1945.10.31.
박헌영에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가입 요청
  •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남로당 박헌영에게 가입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함
1945.11.21.
라디오 방송에서 공산당과 결별 선언
1945.12.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

1946

1946. 1. 7.
신탁통치를 결절한 모스크바 3상회의 의정서 반대
1946. 2.14.
초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 미군정과 함께 구성한 민주의원 의장을 맡아 협력
1946. 2.28.
미국무부가 맥아더 장군에게 이승만과 김구를 견제하라고 지시
1946. 3.
미소공동위원회의 주장에 회의 표명
  •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할 목적으로 설치된 미소공동위원회의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적 입장을 표명함
1946. 6.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
1946. 6. 3.
정읍발언에서 남한만의 과도정부부터 세울 것을 제의
1946. 6. 6.
미국무부의 진보적 인사 지원 지시
  •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과 도출을 위해 소련과의 협상에서 진보적인 인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미 국무부가 하지 중장에게 ‘이승만과 김구 등 늙은 망명객들을 퇴출시키라’고 지시
1946. 6.29.
민족통일총본부 설치
  • 자율적인 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의와는 관계없이 민족통일총본부 설치함
1946. 8.14.
카이로 선언 이행 촉구
  • 트루먼 대통령에게 카이로 선언의 조기 이행을 촉구함
1946. 9.
돈화문 앞에서 권총 저격을 당함
1946. 9.21.
하지 중장에게 좌우합작 정책 중단 요구
1946. 9.10.
한국독립문제를 UN에 넘기도록 설득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견
1946.10.28.
모스크바 의정서 무효화 요구
  • 모스크바 의정서가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선언에 위배된다며 무효화를 요구함
1946.12. 4.
한국독립 방안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 워싱턴 방문
  • 남한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6개항을 미국무부에 전달함
  • 1947. 1.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최고고문
  • 1947. 2. 미육해군연합협회 감사장 수상
  • 1947. 2. 미육해군연합협회 금(金) 명예훈장 수훈
  • 1947. 3. 3. 김구가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이승만을 주석으로 임명했으나 이승만은 수락을 보류함
  • 1947. 3. 반공을 천명한 트루먼 선언이 발표되자 서한을 보내 지지와 감사를 표시함
  • 1947. 3.22. 미국정부와 남한 과도정부 수립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성명서를 <뉴욕타임즈>에 발표해 미국무부와 충돌함

1947

1947. 4.
장제스 총통 면담
  •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중국의 초청을 받아 남경에서 장개석과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문제를 협의함
1947. 5.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 이승만의 예상대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남
1947. 8.
미 국무부 엘리슨계획 수립
  • 총선거로 한국정부를 세운다는 내용이 담긴 엘리슨계획 수립
1947. 9.
미 국무장관 한국문제를 UN에 넘길 것을 제의
  • 마셜 미 국무장관이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를 UN에서 처리할 것을 제안함
1947. 9.
대동청년단 총재
1947.10.18.
이화장 입주
  • 집이 없는 이승만의 딱한 사정이 알려지자, 백성욱, 권영욱, 전용순, 신용욱 등 33인의 실업가들이 돈을 모아 이화장을 구입해 거주지로 제공함
1947.11.14.
한국독립정부 수립안 UN총회 통과
  • UN미국대표 덜레스가 한반도에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제안이 통과 됨

1948

1948. 1.
선거관리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서울 도착
1948. 2.
남한 단독 선거 결정
  • 북한이 선거를 거부하자 유엔소총회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함
1948. 4. 1.
남북협상 추진 비판
  • 김구, 김규식이 추진하는 남북협상은 소련의 의도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함
1948. 5.31.~
1948.7.24.
대 국회의장
  • 1948. 5.10 제헌국회의원(동대문구 갑)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개원이 되자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됨
1948. 7.24. ~ 1952.8.14.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 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 무궁화대훈장, 건국공로훈장, 중장 수훈
  • 국가승인을 받기 위해 파리UN총회에 한국대표단 파견
1948.10.13.
40여명의 좌익 및 중도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미군 철수안을 제출
1948.10.29.
민병대 조직 선언
  •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치안을 강화하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함
1948.12.12.
파리UN총회에서 대한민국이 국가 승인을 받음

1949

1949.
서울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학위 수여
1949. 3.
필리핀을 설득해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을 제의하도록 종용
1949. 6.
미군 철수
1949.10.16.
미 군사고문단의 탱크 요청 거절
1949.12.16.
미 군사고문단의 비행기 등 중무기 요청 거절

1950

1950. 6.17.
UN사찰단 한국 방문
  • 덜레스를 대표로 하는 사찰단이 북한의 잦은 38선 도발을 조사하기 위해 입국했으나 북한측의 거부로 38선 이북의 병력배치는 조사하지 못했으며, 이승만은 미국의 극동방위계획에 한국 포함을 제의함
1950. 6.25.
6.25전쟁 발발
  •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38선이 소멸된 것으로 판단함
1950. 7.12.
군사작전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에 이전(대전협정)
1950.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
1950.10.12.
원산 방문
1950.10.
국군의 압록강변 진격
1950.10.30.
평양 방문
1950.11.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UN군과 국군 후퇴
1950.12.24.
서울시민에 피난 명령

1951

1951. 1. 4.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어줌(1.4후퇴)
  • UN휴전 3인위원회는 휴전을 건의하며 대한민국의 해체와 새로운 남북한선거에 따른 정부수립을 제안함
1951. 1.14.
일본군 참전설 반대
  • 일본군이 참전하면 일본군부터 격퇴해야 한다며 강력히 반발함
1951. 4.
맥아더 장군 해임
  • 확전을 주장한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해임 당함
1951. 7. 3.
휴전반대 전문을 트루먼 대통령에 전달
1951. 9.20.
휴전 전제 조건 제시
  • 휴전을 하려면 중공군 철수, 북한군 무장해제. 북한만의 총선거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함

1952

1952. 1.18.
일본으로부터 수자원과 독도를 지키기 위한 평화선 선포
1952. 3.20. ~ 1960.06.15.
자유당 총재
1952. 8.15. ~ 1956.8.14.
제2대 대한민국 대통령 (자유당)
1952.12. 2.
공산군에 유리한 중립국 인도의 포로교환 방안을 반대

1953

1953.1.18.
미국 법률자문협의회 명예회원
1953. 2.17.
국민당군대(대만) 참전 반대
1953. 3.12.
북진통일 주장
  • 만주국경까지 진격해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함
1953. 5. 8.
휴전 수용 불가 천명
  • 미국에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통고함
1953. 5.31.
인도군 격퇴 성명 발표
  • 반공포로를 관리할 인도군이 오면 격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 인도군이 인천항에 도착하자 상륙을 불허하자 미군이 헬기로 이동시킴
1953. 6. 3.
휴전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요구
1953. 6. 6.
국군 단독 전쟁 수행 성명 발표
  • 미국의 지원 없이 국군만으로 끝까지 싸우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함
1953. 6. 7.
단독 북진 성명 발표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한국의 요구가 무시되면 단독으로 북진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6월 17일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변함
1953. 6.18.
반공포로 석방
  • 반공포로에 대한 인도적 조치를 취하고 휴전 방해할 목적으로 미국과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2만5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함
1953. 6.22.
클라크 UN군 사령관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을 요구
1953. 6.25.
미 대통령특사 월터 로버트슨 서울 도착
  • 로버트슨은 이례적으로 3주간 체류하면서 이승만과 14회에 걸친 협상을 벌임
1953. 7.11.
한미동맹 체결을 전제로 한 휴전 동의
  • 한미동맹에 동의하면 미국이 휴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약속함
1953. 7.27.
휴전협정 조인
1953. 8.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 서울에서 덜레스 국무장관과 변영태 외무장관 사이에 가조인 체결
1953.11.13.
서울에 온 닉슨 부통령에게 한국의 독자적 군사행동이 가능하다고 발언
1953.12. 9.
정치회의가 1954년 1월말까지 열리지 못하면 전투가 시작된다고 미국을 위협
1953.12.16.
정치회의를 90일을 넘기면 한국은 독자행동을 할 수 있다고 미국에 통보

1954

1954. 1.30.
태평양동맹결성 촉구
  • 일본의 재침략 위험을 경고하며 태평양동맹결성을 촉구
1954. 2.12.
한국군 파견 제의
  • 공산군과 내전이 벌어진 인도차이나 반도에 한국군 파견을 제의
1954. 3.10.
세계의 공산세력과 싸울 국제반공십자군 창설을 제의
1954. 4.~6.
한반도 평화통일을 논의하기 위한 제네바 정치회의 개최
1954. 4.24.
인하공과대학 설립
  • 한국의 과학인재 육성을 위해 미국의 엠아이티와 같은 공대 설립 목표로 인하대학을 설립함.
1954. 6.24.
한국군의 유엔군 철수 통고
  • 현 상태에서 휴전이 되면 한국군은 유엔군에서 철수하겠다고 통고
1954. 7.30.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1954. 7.28.
미국 국민 방문
  • 아이젠하워의 초청으로 미국 방문해 양원합동회의에서 중공에 대한 예방전쟁을 역설
  • 1954. 7.31. 휴전감시위원회에서 공산국 대표들의 축출 요구
  • 1954. 8. 뉴욕에서 록펠러 등 미국 기업가들에게 한국 투자를 호소
  • 1954. 8. 2. 컬럼비아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뉴욕시 공중봉사 공로훈장 수훈
1954. 8.30.
미국의 일본 편향 정책을 비판
1954.11. 4.
일본의 한국 재침략 몽상을 비판
1954.11.14.
일본의 반공동맹 참여에 반대
1954.11.18.
한미동맹에 따른 군사경제 원조를 규정한 한미합의의사록이 효력 발생

1955

1955.3.21.
미국 금영자유훈장 수훈
1955. 6.26.
인도차이나 내전에 한국군 파견 의지 피력
1955. 7. 7.
공산권에 대한 미국의 유화정책 비판
1955. 8.13.
휴전협정 즉시 폐기 요구

1956

1956. 2.13.
공산권에 대한 일본의 접근을 비판
1956. 7.~12.
원자력 기술도입 추진
  • 미국인 전기 기술자 W.L 시슬러의 경무대 방문 후, 한미 평화적 이용을 위한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으며, 원자력 기술의 적극 도입을 지시함
1956.8.15.
제3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자유당)
1956. 9. 1.
미국의 유화적인 극동 정책이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
1956.11. 7.
소련에 대한 헝가리의 자유주의 혁명을 돕겠다고 언명

1957

1957. 3.28.
서방측이 극동문제를 등한시한다고 비판
1957. 4. 2.
유도탄 무기 도입을 역설
1957. 6.19.
UP기자에게 북한의 남침 위험성을 지적
1957.10.21.
미국의 경제원조 삭감을 우려

1958

1958. 2.23.
유엔군 철수에 반대
1958. 3.31.
인도차이나 내전에 한국군 파견의지를 표명
1958. 6.29.
남북통일은 북한만 자유선거하면 된다고 주장
1958. 9.13.
중공의 대만 포격에 강력히 대응한 미국 지지
1958.10.28.
원자력연구소 설립
  • 서울대학교 원자력 공학과 설치 및 신입생 선발
  • 100여명의 원자력 기술연수생 미국 파견 기술의 적극 도입을 지시
1958.11.6.
사이공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 수여

1959

1959.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마크Ⅱ’도입

1960

1960. 2. 4.
공산당보다 일본을 더 경계해야 한다고 발언
1960. 4.26.
4.19혁명으로 대통령 자진 하야
1960. 5.29.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하와이로 출발

1962

1962.
귀국을 희망했으나 박정희 군사정권의 반대로 좌절

1963

1963. 7.19.
트러플러 미육군병원(하와이 소재)에서 서거(향년 90세)

1965

1965. 7.23.
이승만의 영구 김포공항 도착
  • 빈소인 대학로의 이화장으로 옮겨짐
1965. 7.27.
동작동 국군묘지(현충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