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의 생애

우남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유년기 서당에서 동양의 고전을 익힌 다음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양의 신학문과 정치사상을 수학했다. 동학들과 『협성회회보』를 창간하여 주필로 활동했으며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일간지 『매일신보』를 개간하여 근대 한국언론의 새 지평을 열었다.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에 참여, 만민공동회에서 총대위원으로 활약하며 최초의 근대적 시민운동을 이끌던 중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다. 5년 7개월간의 옥고 중 옥중도서실을 운영하고 각종 논설을 언론에 기고하며 시민의식을 일깨웠다. 독립을 향한 우남의 강렬한 열망과 개명한 정치사상, 기독교 입국론 등이 총망라된 『독립정신』을 집필했고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출옥 후 이승만은 고종황제의 측근 민영환, 한규설의 후원으로 도미하여 미국 국무장관, 대통령 등을 만나 대한제국의 독립보전을 위한 외교활동을 수행했다.

한편 조지워싱턴대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마하기 시작하여 하버드대학교 석사, 프린스턴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이승만은 YMCA 국제위원회에 의해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 YMCA) 한국인총서기로 임명되어 고국의 학생들의 교육 증진과 신앙 성장에 힘썼다. 이후 하와이로 건너가 출판 및 언론활동, 교회 및 교육기관 설립활동 등에 주력하며 독립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갔다.

한국 민족의 대표성을 갖고 전개한 본격적인 독립활동은 1919년을 기점으로 시작했다.

국내의 거족적인 3.1운동의 흐름과 같이하여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서 “대한인총대표회의”를 개최, 독립 후 건립할 나라는 우리 민족 최초의 민주공화국임을 밝히고 이를 대외적으로 알렸다. 때마침 상해 프랑스조계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이승만은 한국민족운동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 C.에 구미위원부를 창설하여 국제사회를 상대로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의 거점을 구축했고 워싱턴회의 외교, 국제연맹외교 등 해방 이전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연대 속에서 독립외교를 활발히 전개했다. 미국 의회에 한국 독립 승인안이 상정되고,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에게 한국 독립 관련 문건이 배포, 회람되는 등 부분적으로나마 공식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미국 내에 한국 독립을 위한 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우호적인 국제사회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독립외교활동 여정 중 만난 프란체스카와 부부의 연을 맺었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의 외교활동에 적극적으로 조력했다.

해방 이후 미증유의 혼란 상태에서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주도하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하에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하도록 지원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총선거인 5.10 총선거 직후 제헌국회가 소집되었고 이승만은 의장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의 제정작업을 총괄했다. 제헌헌법은 자유와 평등권, 권력 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 등 근대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핵심요소를 모두 내포하였고 대통령제의 정치제체와 자유경제체제를 표방했다. 이 헌법이 제정·공포됨으로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세워질 수 있었다. 이후 국회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196명 중 180명이라는 압도적인 표를 얻어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을 수립한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으로부터 ‘한반도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는 데 성공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미군의 즉각적인 개입을 실현시켜 한반도 공산화를 저지했으며 국난 중에도 일명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며 독도를 지키고 한국의 해양주권을 사수했다. 정전협정의 체결과정에서 반공포로석방의 초강수를 두는 등 미국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여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을 이끌어 냈으며 이는 한국외교 역사상 가장 빛나는 성과였다. 이로써 전후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체제의 안전장치 하에서 미국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통해 정치적·경제적 재건 및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까지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사회기반을 확충했으며 세계사 유례에서 보기 드문 괄목할 만한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1960년 4.19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고 하와이로 가서 머물다가 1 965년 7월 19일 호놀룰루의 요양원에서 영면하였다. 장례는 정동감리교회에서 가족장으로 치른 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