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정한경 등과 함께 필라델피아 시내 리틀 씨어터(Little Theater)에서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여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건설의 대강을 담은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지지를 요청한 <미국인에게 보내는 호소문> 등 5개의 결의문을 채택함
4월 16일에는 모든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시내로 나와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행진함
1919년 4월 23일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
13도 대표들이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
이승만이 3개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되자 일본제국 정부 명의로 이승만에게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림
1919년 4월 14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 활동본부 설치
1919년 6월 14일 ~ 27일
세계 주요국을 상대로 국가승인 요청
‘대한공화국’ 대통령 직함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평화회의 의장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 발송
1919년 6월 30일
미 상원에 독립청원서 제출
구미위원부 고문변호사 프레드 돌프에게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강조한 ‘대한민국을 위한 진술과 적요(Statement and Brief for the Republic of Korea)’를 작성하도록 한 뒤, 셀던 스펜서 상원의원을 통해 의회에 제출(미 의회에 한국문제를 최초로 상정)
1919년 7월 4일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 발표
1919년 7월 17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 설치
1919년 8월 25일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 설치
독립외교를 전담할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 for the Republic of Korea)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김규식, 위원으로 정한경, 이대위, 송헌주, 고문변호사로 프레드 돌프를 각각 임명함
1919년 9월 6일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됨
1919년 10월 ~ 1920년 6월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독립지지 요청 연설
1920
1920년 3월
한국독립승인안 미 상원에 상정
찰스 토마스, 존 쉬로스 미국 상원의원으로 하여금 한국독립승인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케 함. 상정된 안건은 본회의에서 부결됨
1920년 11월 15일
비서 임병직과 함께 호놀룰루에서 출항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에 부임하기 위해 호놀룰루 항에서 비서 임병직과 함께 몰래 화물선에 오름. 일본이 30만 달러의 체포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에 중국인 시체를 넣은 관 속에 숨어 있었음
1920년 12월 28일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식 개최
12월 29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초대 임시대통령 취임식을 개최하고 이후 5개월간 집무
1921
1921년 5월 29일
대통령 교서 발표 후 상해 출항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으로 인해 상해를 떠난다는 대통령 교서를 발표하고 상해에서 출항
1921년 6월 29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대한인동지회 결성
1921년 8월 10일
워싱턴회의(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놀룰루에서 출항
1921년 8월 2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대표단 결성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한국대표단(Korean Mission) 조직(대표장: 이승만, 대표: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돌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9월 9일 한국대표단에게 워싱턴회의(Washington Conference, 1921.11.12~1922.2.6)에 관한 전권 부여
1921년 10월 1일 ~ 12월 1일
워싱턴회의 미국대표단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 제출
12월 1일 한국대표단의 청원문 <군축회의에 드리는 한국의 호소(Korea’s Appeal to the America Delegation on Limitation of Armament)> 발표
12월 14일 윌리엄 킹 상원의원에 의해 미 의회에 배포
1925
1925년 3월 23일 ~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 면직안을 의결하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공표
1929
1929년 10월 5일 ~ 1930년 1월 8일
재미한인사회 시찰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여 재미한인사회를 시찰하고 호놀룰루로 귀환
1931
1931년 11월 21일
만주사변 발발 후 외교적 목적으로 미국으로 출항
만주사변 발발 후 만주국 문제가 외교적 쟁점으로 부상하자 미주동포들로부터 외교자금을 조달하여 호놀룰루 출항
워싱턴 D.C. 도착 후 국제연맹외교를 위한 준비활동 전개
1932
1932년 11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제연맹 특명전권수석대표로 임명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제연맹외교를 위한 특명전권수석대표로 임명하고 제네바로 파견
1933
1933년 1월 4일
제네바에서 국제연맹외교 전개
1932년 12월 23일 뉴욕에서 출발하여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거쳐 국제연맹 본부가 있던 제네바에 1933년 1월 4일 도착
1933년 2월 22일
국제연맹에 성명서 제출 및 회람
2월 8일 한국문제를 담은 문건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특파원들에게 배포
2월 22일 이승만의 성명서가 국제연맹에 제출되었고 대한인동지회의 서신과 함께 배포 및 회람됨
미국 언론과 <주르날 드 제네바>, <라 트리뷴 도리앙>, <데어 분트> 등 유럽 언론에 이승만의 외교활동에 관한 기사가 게재됨
1933년 3월
<만주의 한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 출판
만주문제와 관련된 한인의 문제를 다룬 <만주의 한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을 서영해가 파리에서 운영하던 고려통신사를 통해 출판
국제연맹 관계자들에게 배포
1933년 7월 9일 ~ 10일
모스크바 방문
소련에게 독립지원을 호소해 보고자 비엔나를 경유하여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했으나 즉시 퇴거당함
1933년 10월 8일
뉴욕 렉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
1934
1934년 4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행서 외무위원으로 선임
1935
1935년 1월 24일
부인과 함께 호놀룰루로 귀환
호놀룰루에 도착한 후 교회 건립활동과 교육기관 설립활동에 매진
1939
1939년 3월 30일
중일전쟁 발발 후 외교적 목적으로 미국으로 출항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점차 세계대전의 징후가 보이자 독립외교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워싱턴 D.C.로 출발
4월 13일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구미위원부 재건을 위한 시찰 및 활동을 수행
8월 10일 호놀룰루로 잠시 귀환했다가 11월 10일 프란체스카와 함께 워싱턴 D.C.로 이주
1941
1941년 4월 20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으로 임명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겸 주워싱턴 전권대표로 임명
1941년 8월 1일
영문 저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출간
1939년 겨울부터 1941년 여름까지 집필하여 뉴욕 플레밍 레벨사를 통해 출간했으며 부인 프란체스카가 영문 원고를 타이핑함
출간 후 4개월 만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자행되자 미국의 베스트셀러로 등극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포고문 전달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미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대통령 루즈벨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함
1942
1942년 1월 16일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 창설
미국 의회 상원 원목 프레데릭 헤리스,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가 중심인물이었으며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
1942년 2월 27일 ~ 3월 1일
대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워싱턴 D.C.의 라파옛 호텔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함
윈크스 방송국은 라디오로 회의를 중계했고 한인들의 독립의지와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의 열의가 크게 기사화되는 계기가 됨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 시작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해외 및 고국의 동포들을 격려하고 투쟁을 촉구
1942년 8월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
1942년 10월 10일
한인 게릴라조직 추진
미 육군전략사무처(OSS) 프레스톤 굿펠로우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12월 4일 OSS에 통보한 50명의 한국인 중 12명이 선발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
12월 7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 발송
1943
1943년 3월 30일
하와이 한인 처우 개선 요청
스팀슨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청했고, 육군장관으로부터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회신을 받음
1943년 4월 8일
아메리칸대학교 교정에서 한국 벚나무 식목행사 개최
도쿄시장이 기증한 벚나무가 ‘재패니즈 체리트리’로 불리던 것을 한국 벚나무로 원산지를 바로 잡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24주년 기념식에서 식목행사를 개최
1943년 5월 15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
1943년 8월 23일
제1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
1944
1944년 1월 21일 ~ 22일
애슐랜드 한국독립 승인대회 참석
오하이오주 애슐랜드에서 개최된 한국독립 승인대회에 참석
카이로 선언으로 인한 대외적 한국 선전효과를 강조한 이승만의 연설은 미 전역에 라디오로 중계됨
1944년 9월 11일
제2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즈벨트와 처칠에게 카이로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냄
1945
1945년 2월 5일
미국 국무차관에게 임시정부 즉각 승인 촉구
미 국무차관 조셉 그루에게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의 즉각 승인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냄
1945년 5월 14일
얄타밀약설 폭로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함으로써(얄타밀약설) 미 국무부와 충돌
1945년 8월 15일
해방
즉각 귀국하려 했으나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 국무부의 방해로 2개월간 지연됨